주일말씀

2006-04-30  부활의 동행자

임보순 0 1427
 

부활의 동행자(눅24:13/31)

오늘날 현대교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달구지 같은 교인은 늘 앞에서 끌어주어야 하고 뒤에서 밀어주어야 갑니다.

그리고 연과 같은 교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뭔가 끈을 붙들고 있어야지 끈을 놓아 버리면 날아가 버리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고양이처럼 늘 토닥거려 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하는 성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풋볼과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풋볼과 같은 사람은 다음 순간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날씨와 상황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튀기에 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풍선과 같은 성도가 있는데 뭐가 그렇게도 불만인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등과 같은 성도들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항상 깜박깜박하는 사람입니다.

불이 붙었다가 커졌다가 열심을 내다가 쉬었다가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힘없이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몇일전만 해도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라 다니면 열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낙심과 절망 속에 예루살렘을 등지고 자기들의 고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 주셔서 그들과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해 주시고 그들에게 부활신앙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을 찾아 주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신 그 주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까?

늘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동행자가 무엇입니까?

1.부활의 동행자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 옛날 주님은 친히 그들과 동행하셨지만 지금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주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까?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닌데요 저는 어떤 집사님이 전도해서 구원을 얻었는데요 저는 우리 어머님이 전도해서 구원을 얻었는데요...

그러나 여러분을 전도한 그 집사님이나 어머니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교회를 통하여 믿음이 성장했고 교회를 통하여 전도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교회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교회를 통하여 믿음이 새롭게 되고 교회를 통하여 믿음이 뜨거워 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를 가볍게 생각하고요 예배에 빠지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요

교회를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무의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계십니까?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있고 교회를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2.부활의 동행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말씀을 들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총 주제가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부활의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이고 부활의 주님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5장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들었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서도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되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라는 고향을 향해 절망적인 발걸음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부터 보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자자의 글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자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자 그들의 믿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32절에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눈이 열리고  말씀을 들을 때 귀가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통하여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이요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가장 많이 팔리는 베스트 셀러가 성경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날 집집마다 성경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집집마다 방마다 성경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 52%의 사람들이 주일날 성경봉독시간에 성경을 펴보고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의 52%이상이 주일날 성경봉독 때 성경을 읽을 뿐이지 일주일 내내 성경을 열어보지도 않는다는 통계입니다.

일주일 내내 덮어 놓고 믿는 다는 것이죠

부활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 여러분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능력있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덮어 놓으니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덮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칼힐티는 말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사람의 불행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행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의 시대적인 상황을 보면 참으로 암흑기였습니다.

교권이 부패하고 정권이 타락하고 그야말로 빛이 보이지 않은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럴 때 루터가 오직 성서!로  솔라 스크립투라!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성경을 번역하여 백성들이 성경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칼빈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강단 중심의 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 까지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져 신부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성경을 낭독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러니 하고 듣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알아보기 쉬운 언어로 번역되면서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부활의 동행자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설교가 시작되면서 영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되자 독일사회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사회가 변화되면서 유렵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성경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미국사회가 일어나고 미국사회가 전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나라에 건너오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면서 무지와 어둠속에 있던 조선이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영적인 거성들 한국교회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의 강단을 통하여 한국교회가 일어났고 이와 함께 이 민족이 부흥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선포된 설교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볼 때 눈이 열리고 말씀을 들을 때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기고 말씀을 통해 확신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목사가 강단에서 말씀을 쉽게 풀어서 설명할 때 믿음이 생기고 마음이 열리면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3.부활의 동행자는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 29절부터 보면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식사를 하시는데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자 제자들이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떼어주시는 떡을 받아먹고 눈이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떼어주시는 사랑의 떡을 받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뭔가 함께 먹을 때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려서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주님을 알아봅니다.

함께 먹는다는 것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사람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함께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먹회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먹회를 얼마나 잘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시는 곳 마다 얼마나잘 드셨는지 모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식사를 했고 대접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고 가서 드셨습니다.

얼마나 잘 드셨는지 안티세력들은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셨을까요?

함께 먹을 때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눌 때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동안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고 서로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교제에도 능력이 나타나는데 주님이 함께하시는 나눔 공동체야 어떻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행2:42절에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여서 떡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구역모임을 하고 각 기관모임이다 소그룹 모임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져 모여서 예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음식도 나누고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오픈하면서 서로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고 간증을 나누고 삶을 나눌 때 거기에서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믿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왜 혼자 아파하고 왜 혼자 고통스러워 하는 것입니까?

주님과 나누어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주님의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제자들처럼 믿음이 약한 지체들이 있습니까?

나눔의 공동체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잘 타는 장작불도 꺼내어 놓으면 연기가 나고 꺼져버리지만 그러나 아무리 생 나라고 하더라도 잘 타는 화독에 들어가기만 하면 불이 붙게 되는 것처럼 내 미음이 약해지고 부활의 주님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했다고 할지라도 나눔의 공동체에 들어가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고 부활의 주님을 깨닫게 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빌레몬서1:6절에 보면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과 만나서 떡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다가 보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부활의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한집에서 살고 한 솥밥을 먹고 살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해 보지 못했고 아버지와 단둘이 깊이 있는 대화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져 일상적인 대화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에 와서 학교에 다니는데 아버지가 다니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단둘이 몇 일을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함께 잠도 자고요 함께 대화도 나누고요 함께 여행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가끔 출타하면 장로라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설교집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기독교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 드렸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라 용돈을 받고 지내는 처지지만 그날 그 책은 제 돈으로 사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내려가시면서 그 책값보다 몇 배의 돈을 주머니에 넣어 주시고 가시는데 가시다가 돌아보시며 웃으시며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셔서 임종도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아버지와 몇 일 함께 하면서 먹고 마시고 함께 자고 그리고 여행도 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와 함께 한 그 짧은 시간이 아버지에 대해 마음을 열게 하였고 아버지의 사랑을 뼈져리게 느끼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우리와 함께 하신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아닙니까?

오늘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지도 못하고 깨닫고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 부활의 동행자이신 주님

교회를 통하여 말씀으로 통하여 나눔의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부활을 주님을 만나고 느끼고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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