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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의 위대한 지도자들에게서 배우는 교훈

광성교회 0 805
 하나님의 백성, 어떻게 이끌것인가?
지난 사십 여 년 동안, 나는 공동체 리더십(group leadership)에 대해 다양만 각도에서 관찰하는 기회를 가져왔다. 공동체와 함께 지내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볼 때 내가 지도력에 대해 상당히 강력한 감각을 개발시켜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경에는 리더십에 관한 교훈들이 풍부하다. 그 중에 내게 큰 감동을 준 성경의 지도자들을 선택해서 그들의 리더십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에 대해 당신도 공감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님 : 소수와의 친밀함
 지도자가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이 경영학의 전형적인 가르침이다.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이 다른 사람의 질투를 불러일을킬 수도 있고 또 친한 사람에게 지시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조언을 무시하셨다. 그분은 총애하는 사람을 두셨다.
 예수님께서는 열 둘을 택해서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고 그들과 더불어 생애의 반을 보내셨다. 나아가, 열 둘 가운데 핵심적인 세 사람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셔서 변화산의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게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의 절망의 심연에 그들이 함께 해주기를 원하셨다.
 지도자가 고독하다는 것은 실존적 문제이다. 나는 고독의 문제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두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한다든지, 바란다든지, 하고 싶다는 말을 쓰지 않고 필요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지도자에게는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염려 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약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강점이었다.

이사야: 자원함
 나는 이사야가 그를 부르신 소명에 반응한 태도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성전에 가득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위엄에 눌린 예비 선지자는 자신의 죄와 무능에 압도당했다. 하나님은 핀 숯을 가진 천사를 보내셔서 이사야가 죄책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켜 주셨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 입술을 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죄의 보증을 얻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에게는 머뭇거림이나 체면을 차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완곡하게 저항한 흔적도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외쳤다. 이사야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자신을 드렸다.

베드로: 수많은 실수를 덮는 열심
 나는 허세를 부리는 어부 베드로를 좋아한다. 그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어색한 순간에 항상 엉뚱한 말을 했다. 예수께서 그의 발을 씻으려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다음에는 온몸을 씻어 달라고 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목격한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언덕 위에 초막을 짓자는 어리석은 제안을 불쑥했다(막9:5-6).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깊이 상처를 받으신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고 책망하셨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들었었다. 물론 그런 후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 계집종이 쳐다보는 작은 압박에 몰려 주님이 발코니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분을 부인했다.
이러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흥하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왜일까? 베드로에게는 주님과 주님의 일에 대한 불붙는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기위해 그물에 가득한 고기들을 내버려두고 떠났던 사람이 베드로였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만이 선뜻 대답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로 결정했던 바로 그 적대적인 유대지도자들 앞에서 베드로는 대담하게 선포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19-20)

느헤미야: 조직화하는 솜씨
 느헤미야는 바벨론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으로서 능력 이하의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일을 맡은 첫낭 왕국의 술 창고를 정리하는 느헤미야를 머리에 그릴 수 있다. 술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연도와 산지에 따라 쌓여지고 각 병들은 재고 목록에 대조표시가 된다.
 느헤미야는 조직의 명수였다. 애국자였던 이 유대인은 많은 지도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비밀을 알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최선을 다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탁월한 봉사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왕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려운 부탁을 했을 때 왕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황폐한 성읍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낙담되어 있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조기 경계 경보를 포함한 방어체제를 구성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손에 창을 들고 한 손에 삽을 들고 일했다. 52일 후에 성벽이 완성되기까지 한시일도 일은 중단되지 않았다.
 조직이 위대한 지도자를 만들지는 않겠지만 조직이 없으면 확실히 많은 일들이 좌절될 것이다. 담당해야 하는 일에 관련된 모든 사소한 일을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시스템을 사용할 것인가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좌우지간 하나의 시스템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사용하지 않을 때)항상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 크기의 스케줄 관리수첩 이다. 그 스케쥴 관리 수첩과 일 처리해야 하는 업무목록이 내가 이용하는 조직화의 핵심이다. 우리가 일에 끌려 다니지 않고 일을 다루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

호세아: 취약성(Vulnerability)이 가진 힘
 젊은 시절에 나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비웃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소망을 압도해 버렸다. 이러한 이중의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나로 하여금 말문을 닫고 침묵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나의 약점을 드러내어 나에게 불리하게 사용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무엇이 나를 변화시켰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허세를 떨지 않는 몇몇 좋은 분들과의 만남이 나를 자유롭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실제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뒤죽박죽된 행동의 동기를 인정하고 내 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을 솔직히 이야기하며, 때때로 산산이 부서진 꿈을 모두다 털어 내 놓으려고 노력했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비웃기는커녕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내가 나를 열어 보여 남들이 내게 접근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을 때 첫 인상에서 잃어버린 것의 두 배나 얻었다. 나는 체면을 차리는 것보다는 마음을 열고 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호세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창녀와 결혼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읍내의 모든 백성들은 고멜이 매춘부였다는 것과 결혼증서가 그녀의 기본적인 성질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버림받았고 성읍 백성들에 의해 공개적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계속하여 고멜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했다. 호세아는 무조건적 사랑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하나님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응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모든 연약함의 흔적들을 감추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을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하는 편이 더 쉽다.

아모스: 약한 사람들의 옹호자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서 지적이고, 명확하고, 부유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의 필요에 더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야말로 리더십과 특별한 관심과 보호와 지도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건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탁월한 지표는 비참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아모스는 여로보암 왕과 제사장 아마샤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백성들이 자행하는 불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도록 도우려했다. 그는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암 2:7). 그는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암4:1; 6:4).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암 5:21, 24).
아모스는 실패했다. 이스라엘의 권력구조는 갖지 못한 자들을 돌보라는 가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에 충실한 것이 리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인 때가 있다. 리더는 지도할 수 있다. 따를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다.

아비멜렉: 온전함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경건한 지도자들의 목록에서 사라를 후궁으로 취할 뻔했던 아비멜렉이 한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랄땅에 도착했다 (창20장). 그들은 왕에게 사라가 그의 누이라고 말했지만 (법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려 왔지만 그가 그녀를 가까이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셨다 (창20:3). 그러나 아비멜렉은 강력하게 항변했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 20:5).
 하나님께서는 동의하셨지만 그가 사라를 급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되돌릴 뿐만 아니라 그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은 천 개를 주고 사용료 없이 그랄 땅 어느 곳에나 거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이것이 합당치 않은 대접을 받은 사람들의 품위 있는 반응이라고 본다.
 아비멜렉은 온전함으로 행했다. 온전함이란 주변의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우리가 보여주는 공식적인 행동의 진짜 이유를 숨기지 않고 나누는 것이다. 온전함은 모든 기본적인 문제들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쳐야만 한다.

바울: 전염성 있는 확신
 사도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롬12:3)고 했다. 많은 지도자들이 그 말을 오해하여 공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비하하고, 성공의 맛을 느낄 때마다 남몰래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자랑할 이유가 있으면 자랑한다. 바울도 그랬다. 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지도권을 넘어뜨렸을 때 보인 담대한 접근 방식에 매료되었다. 바울은 아주 긴 논쟁을 통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한 표지들을 과시한다 (고후 10-12장). 바울은 자신이 파선되었고, 죽을 뻔했고, 매를 맞았고, 예수님에 대한 특별한 환상을 받았고, 자비량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들이 찾아갈 수 있는 어떤 영적 조언자보다 자신이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소명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을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리더십에 있어서 자기 확신보다 더욱 필요한 덕목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확고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확신을 건방진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건방진 것은 무감각이나 상상력이 결핍된 결과이다. 확신은 당신이 어떠한 장애물이건 극복할 수 있다는 내적 확신으로부터 나온다. 확신은 온화한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부터 올 수 있다.
확신은 매일의 과업을 잘 처리하는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확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능력안에서 당신은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확신은 낭비되어서는 안될 귀한 자원이다. 확신을 즐기도록 하라!

예수님: 섬김이 극치를 이룰 때가 리더십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이용한다. 그들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손에 수건을 들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3-15)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이 성만찬의 실천을 위한 명령인 것처럼 발을 씻기라는 말씀 역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똑같은 며영잉다. 우리는 성찬식을 기념한다. 하지만 세족식은 거의 잊혀진 문화이다. 물론 우리는 먼지 이는 길을 샌들을 신고 걸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봉사에 대한 기본적이고 고귀한 상장이다.
 우리가 우리들이 선호하는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섬김을 받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섬김의 리더십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권력이 가진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이 특히 쉽지 않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러하셨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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