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중보기도와 그 단계(정원목사)

금희숙 0 2608

I.   중보와 사역은 영혼을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중보한다는 것, 사역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속해있는 빛의 세계에서
상대방이 속해있는 어둠의 영계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단다.

그래서 그들에게 빛을 주고
그들을 끌고 빛의 세계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지.

그들이 사역의 결과 기쁨과 해방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속한 영계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혼자 있을 때
다시 침체가 된다면
그들은 다시 자기가 속한 영계로 떨어진 것이지.

그러므로 다시 어둠의 굴로 내려가서
그들을 끌고 올라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역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영계에 속해있지.
죽은 다음에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어떤 영계에 속해있단다.

천국도 지옥도
수천 수만의 영계로 나뉘어지지.
모두가 다 자신의 발전 단계에 맞는 영계에서 산단다.

그런데 지옥에 있는 영혼들은 왜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나사로와 아는 사이인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지옥의 영계에 속해 있었지...

그러나 그는 영혼이 발전하지 않고 마비되어 있었으며
오직 육체의 희락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의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단다.

장갑을 끼고 악수를 하면 상대방의 체온을 느낄수 없듯이
육체라는 존재 때문에 사람들은 지옥에 있으면서도 고통을 느낄 수 없단다.

사실은 그들의 영혼은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자신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나사로의 영혼도 사는 동안 이미 천계에 있는 데 그가 영이 민감하다면 그는 비참한 환경 속에 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이 별로 발전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의 영혼이 천국에 있는 줄도 모르고 환경으로 인하여 슬퍼하겠지...

아무튼 사람들은 육체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영의 세계와 잘 교통하지 못하고 환경과 육체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영이 잘 자라지 않고 낮은 영역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높은 곳으로 올리는 것이 사역이지..

집회하는 것도, 중보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자신이 거하고 있는
밝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빛의 세계에서
고통과 흑암이 가득한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빛의 세계로 다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다.

여기서 사역자는 자신이 올라가 본, 경험한 세계까지만 안내할 수 있단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어둠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수는 없다는 것이지.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역자는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을 도울 수 없다.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이라는 것은
환경을 보면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이상하게 심령이 즐겁고 행복한 것을 말한다.

돈도 없고, 밥도 굶을 지경이고
자기를 괴롭히는 이도 많고..
상황은 그런데
심령은 기쁨이 충만하다.

이것은 그의 영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돕고 이끌수 있는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얻는 기쁨은
사실상 아주 낮은 차원의 기쁨이며
주님의 그의 영혼을 높은 영계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환경의 비참함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사역자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목사다, 사모다, 전도사다..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단다..
다만 주님을 경험하고 그분께 잡히게 되면
우리의 삶 모든 것이 다 사역이 되도록 인도하시지.

영적인 실제가 부족해서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사역자의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니.. 심판만 클 뿐이지...

나도 사람을 돕고 기도해주면서
집회를 하면서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똑같이 겪었단다.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사람을 도와주고 나면
나도 자살하고 싶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면
내 영혼이 너무나 삭막해지고 비참해지고..

또한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을 만나면
주님의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이 빨려 들듯이 받아들이면
내 영혼, 주님의 영이 하늘을 날듯이 기뻐하는 것을 느끼지..

어차피 사는 동안은
온 세상에 악한 기운이 가득하고
주를 사랑하는 이들 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영을 강건하게 해야 하고
전투에 대비해야 한단다.
참 무서운 일이지.

주를 사랑하면 영혼은 해방되고
자기를 사랑하면 영혼은 마귀의 밥이 되는 데
사람들은 그토록 자신에 대한 육적인 애정에 빠져있으니 말이야..
근심, 두려움, 자기 연민, 분노..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사랑에서, 지옥에서 나오는 것들 이란다...

많이 힘들때는 마시는 기도를 해라.
빛의 역사가 있고
영의 역사가 있다.

영을 마시면 영이 강건해져서
조금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싸우면서 자라는 것이니
별로 걱정하지는 말아라...
나는 그 싸움을 20년 넘게 해왔으니까.. ㅎㅎㅎ

힘든 것도 많지만
배우는 것도
즐거운 것도 많단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분량 안에서
조금씩 사역을 하거라.

상대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져도
그것을 이해하거나 고마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ㅎㅎㅎ
그냥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실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단다...
ㅎㅎㅎ

아무튼 믿음의 싸움을 싸우며 강건해지거라.
빛은 영을 밝게 하며
영은 강하게 한다.
부디 승리하렴.



II.  윤미에게(중보기도의 단계)


나도 리즈하월즈와 신디 제이콥스의 책을 읽었는데 참 좋은 책이었다는 것밖에 기억에 나지를 않으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구나.

하지만 나는 신디가 리즈 스타일의 중보의 짐을 지는 것에 대하여 나쁘게 언급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짐을 지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빠져서 균형을 잃는 위험에 대한 경고를 했겠지.

사실 영의 세계나 그 흐름, 영의 전투나 대속의 영적 원리에 대하여 거의 모르는 사람들도 중보기도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지.

다만 영의 실제적인 중보에 대하여 배우고 경험하면 좀 더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이 흑암에서 빠져 나올수 있도록 돕고 주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을 것이다.

중보에는 두가지의 단계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1. 동일시의 단계

이것은 나의 영이 그의 영의 상태와 연합하여 직접 그의 영이 처한 상태로 내려가 그의 고통을 맛보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의 영이 내려가 그의 영과 하나가 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사실 나의 영은 원래의 나의 위치에 있으며 나의 영의 한 부분이 그러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분의 영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으셨다.

모든 인간들은 범죄로 인하여 아버지와의 교통이 끊어졌지만 주님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여전히 아버지와의 교통을 유지하셨다.

2. 올라가는 단계.

동일시를 느끼지 못하면 대체로 상대에 대한 깊은 중보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느끼고 체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중보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고통을 몹시 싫어하여 사람들을 접촉하기를 싫어한다.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
하지만 짐을 지지 않으면 상대를 도울 수 없다.

올라가는 단계는 그 짐을 지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의 영을 이끌고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끌고 올라오는 것이다.
이 올라옴에 성공할 때 우리는 중보에 성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상대를 나의 영의 수준에까지 데리고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속한 곳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오르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사람들의 어둠에 눌린 영혼을 기도와 사역을 통하여 높은 곳으로 올린 경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경우에 그들은 나의 경험보다 더 높은 영계를 경험하고 주를 경험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몹시 기뻤고 그들이 나보다 더 발전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어떤 부분들은 그들의 경험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사람을 통하여 그 사람의 처한 위치보다 더 높이시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신디는 아마 처음의 단계, 영의 내려감, 동일시의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러한 위험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영의 강한 능력, 빛의 경험이 부족하면 상대방의 상태는 분별을 하고 자신도 동일한 고통을 짊어지기만 할 뿐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고 이끌어주지는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사실 아직 그들은 중보를 할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들은 조금 더 무장을 하고 배워야 한다.
좀 더 빛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리즈는 중보자로서 대표적인 주님이 일으키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한 분이지.
나는 이 분의 책을 한번 읽는 것은 보통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정도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참.. 이 책에 대하여 재미있는 추억이 있단다.
처음 이 책을 보면서 하도 많이 울어서 책에 내 눈물로 많이 얼룩이 졌고 그리고 책의 거의 모든 부분에 줄을 치면서 나의 느낀 점이나 기도문도 많이 썼는데 어느 자매 - 나중에 사모님이 되셨는데- 에게 이 책을 빌려 주었더니 그 자매가 나에게 그러는 거야.

너무나 좋은 책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두란노에서 나중에 이 책이 번역되었길래 다시 샀는데 처음 내 눈물과 감동이 어려있었던 그 책만큼 감동이 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 책은 아마 기독교 문서 선교회에서 나왔던 것 같아.. 웃기지?)

그러나 이분도 주님의 은혜로 성장해 가면서 여러 오류와 실수를 통과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분의 젊은 시절, 사역의 초기에는 너무 우울하고 어둡고 그래서 고통 속에 스스로를 파묻은 경향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 세계의 역사를 바꿀 정도로 2차 대전의 승패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그의 중보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그의 중보의 수준과 영적 수준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사에서 히틀러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겠지만 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리즈가 그를 패배하게 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그러나 나는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리즈 - 그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나 워치만 니와 같이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들은 깊고 헌신되어 있지만 필연적으로 자학적이거나 우울하게 만드는 어둠의 속임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단의 올무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오해하여 속는 경향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기질적인 치우침은 모든 위대한 주의 종들에게서도 항상 나타나는 것이었다.

조금 정리가 되었는지.
부디 우리의 영이 열려 온전한 중보를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아름답게 세웠으면 좋겠구나.

내일부터 몽고에 가지?
사랑하고 격려하고 축복한다.
윤미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가시는 것 알고 있지?
아름답고 풍성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샬롬.




III.  중보와 고통, 주의점에 대하여..  


사랑하는 혜경자매..
예전에 자매가 은혜에 많이 잠겨있을 때에
나에게 편지를 많이 보냈었지..
주님을 뵈온 것,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서...
참 좋은 글들이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안 보여서 참 아쉬워...
있으면 여기에 실으면 참 좋을 텐데...

다만..
지금은 좀 더 발전했지만
당시는 분별의 영이 조금 부족했었지...
자매는 너무 착했고..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선함은
사단에게 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누리는 면이 부족했어..
이제 많이 자란 것을 느껴서 아주 기쁘구나...

중보에 대하여 많이 깨달았다고 하니 너무 기뻤어...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안타까와 하기만 할 뿐
그들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으니까...

그들의 고통을, 그들이 속해있는 영계에 내려가야
그들을 도울 수 있는데...
자기가 속한 곳에서 내려가려고 하지를 않으니...

영이 조금 예민하다고 해도
상대방의 영의 상태와 고통을 느끼고 분별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헌신과 십자가를 싫어하여
그러한 고통이 싫다고 도망칠 뿐이지...

하지만 그러한 고통이 없으면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고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지도 못하며
자신의 영이 자라지도 못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는데...

높은 곳에서
밑에 함정에 빠진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빨리 올라오라고 닥달을 하지..

그리고 그들이 도대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곤 해..
강퍅한 영혼이라고,
깨지지 않은 영혼이라고..
그렇게 판단만을 하지...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위로 올라오겠어?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도 없고
그 함정 안에 시커먼 괴물이 같이 있어서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고 있는데...

그러니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
그의 고통과 흑암을 체험하며
곁에서 그 괴물을 결박하고
그를 끌고 올라가는 것이
곧 중보라는 거야...

그게 바로 주님이 하신 것이지..
그분은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빨리 이리 올라와.. 하지 않으셨어...
이 땅에 흑암속에 직접 내려오시고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서
사단과 투쟁을 벌이셨지...

그리고 우리를 끌고 하늘고 올라가셨어..
그리고 우리에게 똑같은 사역을 맡기신거지...
내가 너희에게 내려온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밑으로 내려가라...

베드로는 그랬어..
싫어요..
주님..
저는 높은 산에 있을 거예요...
거기는 너무 유치하고 더러워요...

주님..
저는 이렇게 깊은 임재하심을 맛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초막을 짓고 살게 해 주세요... 네?

물론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어...
주님은 우리를 천국의 맛을 보게 하신 다음에
지옥의 아랫목으로 인도하시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사로잡히셨는데
성령님이 주님을 어디로 인도하셨는지 알아?
광야로 인도하셨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려고...

오늘날 사람들은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면
무슨 외적인 복이 오는 줄 알아...
하지만 그것은 육적인 관점이야...
성경을 보면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고 나서
편안하게 살게 된 사람이 얼마 없지...

오직 자기를 잃어버리고
주님께 사로잡혀 주의 길을 간것 뿐...
성령충만이란 주님께 사로잡히고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
육신적인 안이한 복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

성령을 체험하면
그분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듯이
그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셨듯이
우리도 광야로
인도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해..

예수님은 그 시험을 통과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임하심은 체험하지만
그 후의 광야 체험에서 실패하고 넘어지지.

그리고 한 참 후에
다시 성령의 경험을 하게 돼.
그리고는 다시 광야로 가지.

이번에도 마귀에게 지면
또 다시 시간을 많이 버리게 되고
다음에 성령의 체험이 다시 오지.
그리고 또 실패한다면
그 다음에는 기회가 별로 없어...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의 빛을 받고
주님께 우리의삶을 드릴 기회는
별로 많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부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은 것처럼
오늘날도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을 마치지.

아주 극소수의 성도들만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가며
그들은 심령에 주님의 빛과 영광을 경험하지만
삶에서는 극도의 고난과 비난을 겪게 되지...

하지만 그 피가, 그 고통이
천국에서 거행되는 주님과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몸 단장인 것이야...
그 피가
다 신부의 몸에 걸치는
보석이 되는 것이니까...

빛의 세계에 있으면서
어둠 속에 있는 영혼에게
이리로 오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들은 어둠 속에 있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그것은 사역이 아니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에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이에게
설교를 해서 뭐하겠어?
오직 그에게로 가까이 가야 하는 거야...

사역이란, 중보란
자기의 빛을 버리고
그 어둠 속으로 같이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
주님을 붙잡고 그 상대방을 잡고
그 어둠 속을 헤쳐나오는 거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온실 속에 있고
진흙탕 속에 잘 안 들어가려고 해...
낭만적이고 고상하게 믿으려고 하지..
계속 주님만 거기 진흙탕에 빠져 계시라고 하고...
파티와 교제에 빠지고
진흙탕에 계신 주님에 대하여 시를 지으면서 즐기지...

부흥은 피를 통해서만 오는데
마귀는 피 외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그 피가 없으니 세상이 마귀 천지이지...

중보와 고통에 대하여 주의할 점을 한마디할께..
이것은 자매의 성향상 빠지기 쉬운 유혹이니까...
자매는 마음이 선하기 때문에 상대를 위하여
어떤 대가도 치르려고 할거야...
하지만 거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어...

몰론 우리가 고통을 치르고
그 싸움에서 이길 때
중보의 대상은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고
어둠에서 나오게 되어
지금까지 자기가 어디에서 살았는지..
지금까지 자기가 껴안고 살았던 존재가
어떤 괴물이었는지 보게 돼..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던 존재가
눈을 뜨고 보니
무섭고 더러운 짐승인 것을
비로소 빛 속에서 보게 되지...

사람들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돈, 명예, 권세, 안일한 삶..
그런 것은 사람이 해골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어...

취해 있어서
그 썩은 시체가
천하의 미인이라고 하는 것이지...
깨어나고 나면
비로소 그것이 보이는 거야..
그 전에는 만번을 이야기해도 모르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고통을 치르려는 자세가
수동적이 되어
어떤 고통이든지 느끼고 받으려고 할 때
사탄이 속이고 누를 수 있다는 점이지..

그러면 착하지만 분별이 부족한 성도는
그것이 마귀에게 눌린 것인지도 모르고
창백하고 비참하게 살면서
그게 신령하고 헌신된 삶인줄 알게 돼.

애고.. 오래 쓰려니 힘드네..
간단히 정리를 할께.
그럼 어떻게 이 고통이 마귀가 주는 것인지
참된 중보인지 분별을 하느냐?

그것은 간단해.
실제의 경험을 통하여
분별은 발전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의 허락하신 고통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평강과 기쁨이 있어...

겉으로 고통을 당하고 찢기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느끼고
온 몸이 파괴되는 것 같아도
내적으로는 깊은 기쁨이 있어.

주님의 슬픔 가운데는
고통 속에도 생명이 있고
절망 속에서도 거룩함과 영광이 있어.

아파서 울고 떼굴 떼굴 구르면서도
동시에 은혜와 영광이 있는 거야.
기쁨 속에 고통이 공존하고
슬픔 속에 생명과 주님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지.

그러나 사탄이 주는 것은
뭔가 불안하고
어둡고 비판적이고 차갑고
옳다고 생각하지만 참 기쁨이 없어.

실제의 체험을 통해서 분별해가야 겠지만
중요한 원리는 꼭 기억하기를 바래.
그들은 강한 존재는 아니지만
아주 교활한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속임수에 빠지는 이들은
다들 자신의 교만, 미움, 분노, 자아, 명예욕 등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로써 그들에게 틈을 주게 되기 때문에 속게 되는 것이지.

그러므로 진정 순결함과 겸손함을 지켜야만
우리는 끝까지 그들의 궤계를 분별하고
주님과 동행할 수가 있어.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마귀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대체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라..

오늘날 영성에 대한 거짓과 속임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이들이 미혹되어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분열이 생기지..
그러므로 영적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하고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면 안되고
그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순결함과 온유함, 사랑과 아름다움의 열매를 분별해야 돼...

하지만 방심하지 말고
마지막 전쟁이 마치는 날까지
정말 깨어서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순결함으로
주님을 조심스럽고 붙들고 살자.



IV.


그런데...
아셨어요?
영으로 축복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자신의 영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기의 기도에 바빠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중보기도를 못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영혼은 신비한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중보하면 자신의 영혼도 풍성해지고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으면 영의 흐름과 교통이 없어서 점점 생명력이 약해지지요...

손이 음식을 집어도 입만 먹는 게 얄미워서 손이 음식을 입에 가져다 주지 않았더니 입만 괴로운게 아니고 나중에 손도 힘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체들은 서로 섬기며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충만한 삶의 비결이지요...

그래서 교제가 없이 갇혀있고 고독한 영혼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점점 더 교제가 없고 고독해지니...
종미님...부디 주님의 풍성함을 많이 공급해 주시는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충만한 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샬롬.
정원드림.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