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말씀

날마다 죽노라

임보순 0 589

날마다 죽노라


고사 성어 가운데 東家食西家宿(동가숙 서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과년한 딸을 둔 가정에 중매가 들어왔는데 동쪽에 사는 총각은 외모가 잘생겼지만 가난한 집이었고 서쪽에 사는 총각은 외모는 시



원치 않지만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느 쪽으로 시집을 가겠느냐? 고 묻자 딸이 결혼은 하겠지만 東家食西家宿 하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잠은 동쪽에 가서 자고 밥은 서쪽에서 가서 먹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오늘날 부관계가 문제가 생기고 가정이 흔들리고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을 했지만 한집에서 살지만 가슴속에 또 다른 남자 또 다른 여자를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결혼하는 순간 옛날에 사귀던 애인에 대해서 죽어야 하고 결혼하기 전의 게으름과 나태함 결혼하기 전의 습관과 버릇들에 대해서 죽여야



합니다.



결혼하기전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야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요12:24절에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알이 살아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어서 썩게 되면 거기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앙상한 가지만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무가 잎을 버리고 나무가 몸의 일부를 버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찬바람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 영양분 섭취가 어려운 겨울동안 최소의 영양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새봄에 새로운 새싹을 틔우기 위해 새로운 꽃을 피우고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 자기 몸의 일부를 버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나무가 살기 위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도 죽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죽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금식이 아닙니까?

우리 몸의 장기도 일생을 통해 계속 움직이고 쉬지 않고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며칠씩 금식을 하면 몸에 그렇게 좋다고 하고 요즈음 간헐적 단식(Intermittent fasting)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금식으로 내 몸을 죽이는데 내 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한 가정 늘 웃음이 넘치는 가정에 들어가 보면 가정을 위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내가 죽던지 남편이 죽던지 하나입니다.

주로 똑똑한 사람이 죽고 현명한 사람이 죽습니다.

가정을 살리기 위해 가족을 살리고 자녀를 살리기 위해 내가 살기위해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죽지 못하고 내가! 내가! 하면서 자기주장만 하면 가정은 불화가 계속되고 결국 가정이 깨어지고 맙니다.

죽어야 부부관계가 살고 가정이 살고 자녀들이 삽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속에서 내가! 내가! 하면서 내 말만하고 내 뜻만 앞세우고 내 감정

내 기분만 앞세우면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내 말 내 뜻 내 의지를 죽이면 주변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친구들이 따르고 관계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어야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인간관계를 살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죽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내가 죽어야 살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야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회사가 삽니다.

직장에서 내 사적인 감정이 살고 내 기분대로 살고 내가 성질부리고 싶다고 성질부리고 귀잰다고 회사에 나가지 않고 하기 싫다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않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도 내 감정도 내 성질도 다 죽이고 사장님의 뜻을 따라 살고 회사의 뜻을 따라 살면 인정도 받고 승진도 잘되고 출세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살고 가족이 살고 회사가 살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내가 죽어야 합니다.

교회도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삽니다.

교회에서 내가! 내가! 하면서 내 주장을 하고 내 소리를 내고 내 이론과 내 상식과

내 경험이 살아서 역사하면 교회가 죽게 되고 내가 죽고 내 가정이 죽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죽으면 교회도 살고 나도 살고 가정도 삽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옛사람을 버리고 주님만 모시고 주님만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나의 옛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나의 옛사람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의 습관의 나의 죄 나의 교만과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때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예식은 나의 옛사람 옛습관 옛날의 모습을 다 죽이고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결혼예식인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옛날에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하고



주님과 세상을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교회 문만 나서고 세상에 가면 세상을 사랑하고 옛날에 좋아하던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살



아갑니다.


이것이 바 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이렇게 하는 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가까워 질 수 없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가슴 속에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품고 사는데 그 부부관계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으며 그 가정에 어떻게 행복이 깃들일 수 있겠습니까?

교회 다닌지 1년 2년 5년 10년이 되었음에도 영적인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힘든 것은 아직까지 주님 앞에 버리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세상의 것 옛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따라 보세요

그 순간 주님과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의 나의 모습은 완전히 죽을 때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이 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역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나는 매일 죽어야 합니다.

사명을 위해서 매일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했는데 바울은 사명을 위해서 날마다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서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20: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바울은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던지고 죽였습니다.

고후12장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위해 당한 고난과 시련들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무엇을 죽이고 살아갑니까?

오늘의 시대는 제물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죽어야 영웅이 됩니다.

특별이 화해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위해서 링컨이 죽었고 링컨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이 해결되기 위해서 마르틴 루터킹 목사가 죽었습니다.

인도가 무슬림과 흰두교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간디가 죽었습니다.

간디가 쥐가 고양이를 잡는 방법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쥐가 고양이를 어떻게 잡습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쥐가 쥐약을 잔뜩 먹고 고양이 앞에 나가서 춤을 추면됩니다.

쥐가 쥐약을 잔뜩 먹고 고양이 앞에 가서 춤을 추면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면 쥐약을 먹는 쥐를 먹은 고양이가 죽는 것입니다.

쥐가 죽어야 고양이를 죽인다는 것이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인들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스스로 죽었습니다.

간디가 죽음으로서 인도의 지성 인도의 양심이 깨어났고 살아났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민주주의가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를 죽이는 지도자 자기를 죽이는 가장 자기를 죽이는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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